
그날은 비가 갑자기 내렸다. 원래는 간단히 학교 앞에서 식사만 같이 하고 올 예정이었다. 돌아가는 길에 새로 사 준 우산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듯 했다. 더 이상, 유치하게 감성적으로 돌변하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자문자답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길로 번화가로 곧장 버스를 타고 갔다. 그리고 닥치는 대로,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사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 잡혔다. 번화가에서 항상 지나치던 화장품 가게였지만, 화장품이라는 것에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나에게 그 곳은 거리의 배경 이상의 의미는 없는 듯 했다. 그런 내가, 스스로, 혼자서, 한 걸음씩 들어간다.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조금은 어색하지만 떨리는 손길로 차가운 향수병을 하나 씩 살펴본다. 어쩐지 그리운 초등학교 시절의 리트머스 시험지와 비슷한 크기로 잘려 진 시향지를 하나 뽑는다. 향수의 펌프를 지그시 누르면 치-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물거품이 뿜어져 나온다. 그리고 달콤하고 쌉싸름하지만만,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그런 향기가 배어져 나온다.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아득한 향기는 빗방울과 함께 뒤섞인다. 나도 가게를 나와 그 빗방울과 거리의 군중과 함께 뒤섞여 버린다.
1. 강남역 토다코사에서 샀습니다. 가격은 30ml에 3만2천원. 브랜드 향수치고는 저렴한 축이겠지요. 그래도, 향수 따위에 신경조차 못 쓰던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입니다. '내가 돈 버는 것으로 내가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'다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. 쇼핑중독이 되는 건 아닐까 살짝 우려도 됩니다.
2. 원래 같은 버버리의 Weekend 가 프로모션 중이었지만, 처음 맡았을 때 톡 쏘는 향기가 어쩐지 마음에 걸려서 결국 이 녀석으로 구입. 제 지론은 '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향은 남들도 받아들일 수 없다' 는 것이기 때문에.
3. 첫 느낌은 상쾌하고,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달콤한 향기가 배어 나옵니다. 시향지에 뿌렸을 때와는 다른 면이 있군요. 체온을 만나면 향이 달라지나 봅니다.
4. 버버리 라벨은 박스에 붙어 있는 거 떼서 붙였습니다. 박스도 천으로 포장되어 있더군요. 포장에 공 많이 들인 듯. 원산지는 프랑스 입니다.
5. 생각해보니, 이 향기는 어렸을 적 제 아버지가 쓰던 폴로 에프터쉐이브와 비슷한 느낌이더군요. 어느새 아버지 취향까지 닮아가다니.. 그렇게 한 명의 작은 오이디푸스는, 부정하고 싶었던 그 분의 존재를 모사(募寫) 하고 있었습니다.




덧글
앞으로는 밥을 같이 먹도록 하겠습니...다만, 식사 메뉴는 전적으로 저에게 일임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.
저는 채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같이 밥 먹는 사람들을 초식남....아니, 채식남의 반열에 들여 놓고 싶습니... (거기까지)
// 유혹.. 하면 역시 페르x...... (후다닥)
로 보여서 흠칫한 1인(...)
버버리는 뭔가 단정한 신사의 느낌이 잘 살아있어요.
무심한듯 시크한 님 이미지와 어느정도 부합하는 듯.
데메테르라던가 불가리도 좋아해요.
데메테르는 하나의 변신물을 보는 듯하는 다양한 향수들의 총집합이고..
불가리는 뭔가 Homme Fatal의 느낌이랄까...
근데 둘다 비싸...[털썩]
데메테르는 네이밍 센스가 초큼 怪스러운게..
'First Love' 라는 향수의 향기는 마치 분홍빛 Virgin의 느낌이었고..[뭐?!]
'Clover'는 그야말로 풀냄새 그 자체............ 머리너무 어지러웠어요.
불가리는.. 제가 좋아했던 사람이 즐겨쓰던 향수라.. 아련하군요..
5번 ㅡ> 아아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데스티니..(..)